[사랑과 임무 사이: 이별을 잊기 위해 한국으로 도망친 여군의 기록]
"전장에서는 총탄보다 더 아픈 것이 사랑이었다."
군복을 벗어 던지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조준경을 들여다보던 날들, 아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내 안의 부서진 마음을 감추어야 했던 철저한 고립의 시간들. 전장의 총탄은 피할 수 있었지만, 심장을 관통하는 이별의 기억은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먼 곳,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낯선 땅 한국으로 도망쳤다.
1. 전장의 기억,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이별
나에게 ‘그’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가장 위태로운 전우였다. 차가운 참호 안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우리는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견뎠다. 하지만 전장은 비정했다. 찰나의 오판으로 그는 내 곁을 떠났고, 나는 남겨졌다. 군인은 슬퍼할 자격조차 없었다. 사령부의 명령은 냉혹했고, 나는 다시 총을 잡아야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전사해 있었다. 밤마다 귓가를 울리는 총소리 대신 그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때면,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군복이라는 갑옷은 나를 지켜주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내 상처가 곪아가는 것을 가리는 은폐막에 불과했다. 나는 더 이상 군인이고 싶지 않았다. 죽음의 냄새가 아닌, 삶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은 이유였다.
2. 낯선 땅, 한국에서의 치유와 이방인의 기록
인천공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공기의 무게였다. 화약 냄새 대신 알싸한 찬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이곳의 사람들은 분주했지만 평온해 보였다. 누군가와 총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 폭격 소리 대신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리는 거리가 내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이름 없는 이방인이 되어 서울의 좁은 골목을 누볐다. 낯선 언어, 이해할 수 없는 표지판,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한강 공원의 벤치에 앉아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군복이 아닌 편안한 옷을 입고 나 자신을 마주했다. 산책길에서 만난 이름 모를 꽃들, 따뜻한 찻집의 은은한 향기, 퇴근길 바쁜 사람들의 평범한 뒷모습. 그 평범함 속에서 나는 내 흉터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밤이 오면 여전히 그가 생각났다. 하지만 이제는 눈물보다 그를 그리워하는 담담한 추억으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곳의 시간은 전장의 시간처럼 잔인하게 흐르지 않았다. 묵묵히 제 계절을 찾아가는 자연의 순리처럼, 내 마음의 시계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3. 새로운 임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한국에서의 생활은 내게 또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그것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나를 복구하는 일이었다. 과거의 내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을 하나씩 종이 위에 꺼내 놓았다. 그가 남긴 흉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흉터는 내가 치열하게 사랑했고, 치열하게 견뎌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도피가 아니었다. 진정한 내 인생의 '제2막'을 위한 전략적 퇴각이었음을 이제는 분명히 안다.
이별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서사의 시작점이었다. 이제 나는 군복을 입지 않지만, 그 시절의 강인함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다만 그 힘을 다른 곳에 쓰려 한다. 남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데에. 낯선 땅 한국에서 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만의 평화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전장에서 돌아온 여군, 아니 이제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는 내일의 햇살을 기대한다. 오늘 밤은 어제보다 조금 더 평온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한국에서 써 내려가는, 가장 용기 있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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