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지어주실 때 분명 묵직한 뜻을 그 마음에 깊이 새겨두셨을 테지. 잡을 병(秉), 기둥 주(柱). 이름대로 산다는 옛말처럼, 내 삶의 궤적은 신기하리만치 그 두 글자 주변을 커다란 궤도처럼 맴돌았다. 어릴 적엔 그저 이름이 좀 딱딱하고 무겁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월이 흘러 내가 마주한 내 자리는 늘 누군가의 곁, 혹은 거대한 조직의 중심을 묵묵히 받치는 위치였다. 주체적으로 세상을 향해 깃발을 꽂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심을 잡고 흔들림 없는 균형을 맞추는 일. 그것이 내게 허락된 숙명이자 삶의 방이었다.
군복의 무게와 참모의 자리
임관하여 군에 중위로 복무할 시절, 내 하루는 긴장과 절제의 연속이었다. 당시 부대에서 만난 쓰리許의 한분 대대장, 그 묵직한 영향력을 지닌 분의 지근거리에서 나는 참모의 소임을 다해야 했다. 대대장의 숨소리마저 조율하고, 그가 내리는 지시의 결을 읽어내며, 지휘부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원활히 돌아가도록 윤활유가 되는 일. 젊은 날의 패기만으로는 버거울 수 있었던 그 자리에서 나는 침묵과 충성, 그리고 균형 감각을 배웠다. 누군가의 거대한 그늘 아래서 조직 전체의 흐름을 조율하는 일은 내게 첫 번째 '기둥'을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종합상사와 그룹 비서실, 조직의 심장부에서
군복을 벗고 사회로 뛰어들어 종합상사의 문을 두드렸을 때도 내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발령받은 곳은 그룹 비서실이었다. 어디를 가나 내게 주어진 명함 뒤에는 '비서실'이라는 수식어가 숙명처럼 따라붙었다. 비서실은 화려하지 않지만, 기업이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심장부와 같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회의실의 구석, 최고경영자의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의 고요한 순간,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임원들의 초조한 발걸음 소리까지. 나는 그 중심에서 모든 소음과 마찰을 흡수하며 조직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주인공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기둥이 흔들리면 집이 무너진다는 진리를 나는 매일의 업무 속에서 온몸으로 체득했다. 내가 잡고 있던 것은 단순히 서류철이나 일정표가 아니라, 한 조직의 신뢰와 무게 그 자체였다.
이름값을 한다는 것
돌이켜보면 억울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누군가는 비서라는 자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동적인 위치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내게 비서실은 세상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깊이 있게 조망할 수 있는 최전선이었다. 거대한 기둥을 단단히 붙잡고 폭풍우 속에서도 집의 형태를 유지해 온 세월. 나는 참 정직하게 내 이름값을 하며 살아온 셈이다. 이름대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어진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그 무게를 견뎌내는 아름다운 성실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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