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대지의 능선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하품
제주의 중산간을 가로지르다 보면, 문득 하늘과 땅이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빚어낸 거대한 초록빛 부드러움과 마주하게 된다. 오름. 이 섬이 낳은 수백 개의 오름들은 저마다의 둥근 등허리로 제주의 바람을 받아 안고,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대지의 지문(指紋)과 같다. 그중에서도 용눈이오름이 보여주는 완만한 파동과 새별오름이 뿜어내는 억세고도 아늑한 야성은, 우리가 제주라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비로소 찾아내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시적 유적지다.
공항을 빠져나와 서귀포와 애월의 경계를 지나 새별오름의 자락에 다다를 때,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이미 가을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늦여름의 푸름이 채 가시지 않은 대지 위에 핑크뮬리가 거대한 갈대밭처럼 옅은 홍조를 띠며 물들고, 그 능선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들의 옷깃을 다정하게 두드린다. 오늘 우리는 3천5백 자의 이 깊고 아늑한 기록을 통해, 용눈이와 새별오름이 품은 황홀한 풍경과 그 능선 위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한 추억의 속살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갈 것이다.
본론 1: 용눈이오름, 대지가 그려낸 가장 우아한 지상의 곡선
용눈이오름의 초입에 서면, 이곳이 왜 '용이 누웠던 자리'라 불리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날카로운 암석이나 거친 절벽 대신, 완만한 능선들이 겹겹이 포개져 부드러운 파도처럼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능선을 따라 나지막하게 난 오솔길을 걷노라며 발걸음마다 밟히는 흙의 보드라운 온기와 풀잎들의 사락사락한 숨소리가 심장박동과 나란히 춤을 춘다.
이곳의 풍경은 정지해 있지 않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꾼다. 능선 위로 올라서서 멀리 한라산의 실루엣을 바라보노라면, 대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무언의 위로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인위적인 다듬음이 전혀 닿지 않은 채 오랜 화산의 섭리로 빚어진 이 초록빛 곡선은, 세속의 모서리에 긁혀 상처 입은 영혼의 날들을 둥글고 부드럽게 깎아내리는 대지방의 첫 번째 성소다.
본론 2: 새별오름의 억센 억새와 자줏빛 갈대, 핑크뮬리의 환상곡
용눈이오름의 부드러움을 뒤로하고 서쪽의 새별오름으로 향하면, 풍경은 한층 더 드라마틱하게 변모한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의 새별오름 자락은 억새의 하얀 물결과 함께 눈이 멀 것 같은 핑크뮬리의 자줏빛 갈대밭이 거대한 바다를 이룬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온 들판이 옅은 분홍빛 안개처럼 너울거리고, 그 신비로운 색채는 햇빛을 받아 투명한 은빛 프리즘으로 부서진다.
새별오름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길은 거칠고 숨이 차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펼쳐지는 이 핑크뮬리의 군락은 그 모든 노고를 단숨에 잊게 만든다. 자연이 어떻게 저토록 몽환적인 채도를 품을 수 있는지 감탄을 자아내며, 억새와 핑크뮬리가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내는 사르륵 소리는 마치 대지가 부르는 아스라이 먼 가을의 자장가처럼 귀를 간지럽힌다.
본론 3: 능선 위에 숨겨진 멋진 카페, 훈연과 커피 향이 엉겨 붙은 추억의 성채
새별오름의 핑크빛 능선을 한참 동안 눈에 담고 내려오다 보면, 오름의 풍경과 절묘하게 이어진 감각적인 건축물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새별오름의 억새밭이 액자처럼 걸려 있는 그 멋진 카페는, 여행자들의 지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아늑한 추억의 보물창고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갓 로스팅한 원두의 묵직한 향기와 함께 달콤한 감귤 페이스트의 냄새가 공기를 따스하게 채운다.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차가운 바람을 피해 마시는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 한 잔, 그리고 창밖으로 너울거리는 핑크뮬리의 홍조를 바라보는 그 찰나의 시간.
서로의 손을 잡고 오름을 올랐던 연인의 웃음소리, 창가에 비친 서로의 지친 눈빛을 다독이며 나누던 무심한 안부들. 카페의 따스한 조명 아래 엉겨 붙은 그날의 추억은, 밖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제주의 가을바람마저도 달콤한 생명의 온기로 바꾸어놓는 기적 같은 결계가 된다.
본론 4: 각처에서 온 발걸음들이 빚어내는 삶의 교차로
새별오름의 정상과 카페의 테라스에는 매일같이 대한민국 방방곡곡, 그리고 이국 땅에서 건너온 수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저마다의 속도와 사연을 지닌 채 이 오름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온 이들은, 핑크뮬리 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서로의 무심한 뒷모습에 온기를 더한다.
서울의 거센 빌딩 숲에서 마음을 닫고 살아가던 청년이 이곳의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쉬고, 평생을 묵묵히 밭을 일구며 살아온 늙은 부부가 다정하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미소 짓는다.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이곳에 닿았지만, 눈부신 분홍빛 갈대와 웅장한 오름의 능선 앞에서 이들은 모두 같은 호흡을 나누는 이웃이 된다.
결론: 능선에 가라앉지 않는 분홍빛 안부
새별오름과 용눈이오름의 여정을 뒤로하고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 옷깃에 내려앉은 풀잎의 냄새와 마음속에 고여 있는 분홍빛 안부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들판의 억새가 앙상한 갈색으로 변할지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새별오름 위 아늑한 카페에서 나누었던 커피의 온기와 핑크뮬리의 찬란한 시간이 살아 숨 쉰다.
오늘 저녁, 문득 제주의 서쪽바람이 생각날 때 우리 마음의 깊은 바닥에는 여전히 용눈이의 부드러운 곡선과 새별오름의 핑크빛 안개가 환한 거울이 되어 출렁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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