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조립 여행등 취미생활과 소소한 꿀팁

2026년 7월 10일 금요일

바다가 부르던 날의 파란(波瀾)

 

인생에는 예고 없이 찾아와 삶의 방향을 뒤흔드는 순간들이 있다. 거대한 폭풍우처럼 다가오는 비극일 수도 있고, 때로는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가면을 쓴 채 다가오는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다. 어릴 적 내가 마주했던 홍콩의 리펄스베이(Repulse Bay)는 후자였다. 그곳은 달콤한 초콜릿처럼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손짓하는 천혜의 낙원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하마터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파도의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갈 뻔했다.

수영이라곤 개구리헤엄 흉내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물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맥주병’ 신세의 내가 멋모르고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그날.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홍콩 소녀의 장난스러운 눈빛과 호기심 어린 손짓 하나에 홀려 수백 미터의 심연을 헤엄쳐야 했던 그 아찔한 기억. 오늘은 그날 리펄스베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마주했던 생과사의 경계, 그리고 살아 돌아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서사를 풀어놓으려 한다.


제1장. 리펄스베이, 초승달이 품은 유혹의 바다

홍콩섬 남쪽에 위치한 리펄스베이는 첫눈에 반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반달 모양으로 길게 휘어진 백사장 뒤로는 화려한 고급 아파트들이 겹겹이 서 있고, 바다 건너 불어오는 바람에는 이국적인 소금 냄새와 야자수의 향기가 묻어났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파라솔 아래서 여유를 즐기고, 아이들은 얕은 물가에서 장난을 치며 웃음소리를 터뜨리던 평화로운 오후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모래사장을 거닐며 바다의 구부러진 선이나 감상하려 했다. 물속에 발을 담그는 것조차 내게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수영장 조차 25미터를 간신히 허우적거리다 발이 닿지 않으면 공황에 빠지곤 하던 내게, 바다라는 거대한 물덩어리는 도전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타인의 등장으로 궤도를 이탈하곤 한다.


제2장. 홍콩 소녀의 미소, 그리고 홀린 듯한 발걸음

바닷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있던 내게 다가온 것은 파란 수영모를 쓴 홍콩 소녀였다. 또렷한 눈망울에 햇볕에 그슨 건강한 피부, 그리고 바다가 익숙하다 못해 몸의 일부인 양 가벼운 발걸음을 가진 아이였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와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그녀는 내게 말했다. "저기 저 부표까지 같이 헤엄쳐서 가자. 저기서 보는 바다 진짜 예뻐."

소녀의 눈에는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눈앞의 푸른 바다가 너무나 좋아서, 그 즐거움을 낯선 이방인과 나누고 싶어 하는 순수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내 안의 이성, 즉 "너는 수영을 못하잖아, 물에 들어가면 죽어"라고 외치던 경고음은 소녀의 싱그러운 미소와 "따라와(Follow me)"라는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설마 저기까지 얼마나 되겠어.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것은 내 무모한 인생의 가장 거대하고도 어리석은 오만이(傲慢)였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나는 그저 가벼운 반바지 차림으로 소녀를 따라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제3장. 수백 미터의 심연, 그리고 찾아온 공포

처음 몇 미터는 얕은 물가라 발이 닿았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소녀는 앞서서 가볍게 물살을 가르며 헤엄쳤고, 나는 그 뒤를 개구리헤엄과 허우적거림을 섞어가며 쫓았다. 그러나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바다의 색은 투명한 에메랄드빛에서 짙고 불길한 남색으로 변해갔다.

문득 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심연. 수백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 망망대해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돌아갈 곳도, 발을 디딜 곳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목표로 삼았던 부표는 아직도 아득하게 멀리 보였고, 내 호흡은 이미 턱밑까지 차올라 헐떡이고 있었다.

소녀는 이미 저만큼 앞서가서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빨리 와!" 하지만 내 다리는 이미 공포로 인해 굳어버렸고, 팔은 쇳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물을 몇 모금 삼키고 나니 패닉이 찾아왔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깊은 바다에서 겪는 가장 처절한 몰락의 순간이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 하나만이 머릿속을 하얗게 태우며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제4장.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숨소리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는 그 찰나의 순간,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주마등이 스쳐 갔다. "아,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이름도 모르는 홍콩의 바다에서 수장되는구나." 억울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내 무모함을 향한 분노가 뒤섞였다.

그때, 내 머리끄덩이를 거칠게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앞서가다 이상함을 느낀 홍콩 소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장난기는 사라지고 당황스러움과 공포가 가득했다. "정말 수영 못해?!" 소녀는 내 목을 감싸 안고 안간힘을 다해 나를 지탱했다. 작은 체구의 아이가 성인 남자의 무게를 바다 위로 띄우려 버둥거리는 모습은 비참하면서도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소녀의 지지와 내 안의 질긴 생명력이 결합하여, 우리는 파도를 거슬러 해변을 향해 기어오르듯 헤엄치기 시작했다. 몇 백 미터가 몇 년처럼 느껴지던 그 길고 긴 사투 끝에, 마침내 내 발끝에 부드러운 모래사장의 감촉이 닿았다.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아 컥컥거리며 토해내던 바닷물과 뜨거운 태양 아래서 들이쉬던 거친 숨소리. 그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났다.


종막: 파도가 남기고 간 영혼의 자국

리펄스베이의 모래사장에서 한참을 엎드려 울컥거릴 때, 나를 구했던 홍콩 소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곁을 지키다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름도, 나이도, 연락처도 모르는 그 아이는 내게 삶의 가장 깊은 교훈을 남기고 바다의 기포처럼 흩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에는 남들이 보기에는 아름답고 가벼워 보이는 수많은 유혹과 기회가 존재한다. "저기까지 가볍게 가보자"는 달콤한 손짓에 홀려 내 실력과 분수를 망각한 채 불확실한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죽음의 문턱을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뼈저린 아픔과 공포가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내면의 단단한 기둥을 세우고, 내 삶의 한계를 직시하며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리펄스베이의 푸른 파도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 초승달 같은 백사장을 적시며 밀려오고 나간다. 만약 다시 그 바다 앞에 선다면, 나는 섣부르게 뛰어들지 않으리라. 다만 모래사장에 앉아,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심연을 깊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만의 숨을 고르리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순간을 놓치고 후회하기 전에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아,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낼 걸 그랬어" 하는 짙은 아쉬움 말입니다.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기회는 결코 우리의 사정을 봐가며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이미 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