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38도의 열이 가져온 아수라장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평화롭던 평일 오후, 갑자기 오한이 엄습하더니 체온계 숫자가 거침없이 올라갔다. 38.2도, 38.8도... 38도를 가볍게 넘어선 열기는 순식간에 머릿속을 하얗게 태워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이대로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직감적으로 발걸음을 향한 곳은 집 근처의 수원빈센트병원 응급실이었다.
응급실 응급베드에 누우자마자 백색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링거를 꽂고, 피를 뽑고, 혈압을 재고, 소변을 채취했다. "열이 나는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검사 속에서 나는 이미 환자가 아니라 거대한 의학적 미스터리의 피의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피검사 결과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원인을 정확히 특정할 수가 없네요. 일단 금식하시면서 정밀 검사를 계속 진행해야겠습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내 인생 최고의 고난이자,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10여 일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열흘간의 서바이벌: 금식과 10여 가지 정밀 검사의 바다
배고픔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고, 영혼까지 가출하게 만든다. 첫날은 "어디 아픈가 보지" 하며 버텼지만,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흐를수록 위장에서는 꼬르륵 소리조차 멎어버렸다. 수액 하나로 버티며 하루하루를 버텨낸 지 열흘. 그동안 내 몸은 병원 복도를 누비는 거대한 검사 키트나 다름없었다.
의료진은 원인을 찾기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현대 의학의 기술을 동원했다.
방사선이 윙윙거리며 몸을 스캔하던 CT
통속에 갇혀 쿵쿵거리는 소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MRI
간, 폐, 심장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초음파와 기능 검사
담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복부 정밀 촬영
심지어 심장 스텐트(Stent) 관련 검사까지
10여 일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거쳐 간 검사만 어림잡아 10가지가 넘었다. "여기는 이상이 없네요, 저기도 깨끗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도 원인을 못 찾아 다음 검사로 끌려가야 하는 절망에 빠져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매일 아침 병실 문이 열릴 때마다 "오늘은 또 어떤 기계 속으로 들어가나"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수술실 침대 위에서 교차하던 만감
마침내 사건(?)이 절정에 달한 것은 검사 막바지 즈음이었다. 의료진의 심각한 표정과 함께 내게 떨어진 통보.
"심장 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심장 스텐트 수술을 진행해야 하니 수술실로 이동하시죠."
머릿속이 멍해졌다. 열흘간 금식하며 온갖 고생을 한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심장 수술이라니.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하얀 천장이 휙휙 지나가는 이동식 침대에 누워 바퀴 소리를 내며 수술실로 끌려가던 그 장면이 내 현실이 되었다.
정말 영화의 한 한 장면 같았다. 천장의 형광등이 눈부시게 스쳐 지나가고, 의료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복도를 지나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수술 대기실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이렇게 가는구나' 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그간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의료진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내 차트를 다시 한번 정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마디 무전이 오간 뒤,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아, 환자분! 다시 확인해 보니 심장 쪽에 시술이나 수술이 필요한 급격한 이상 소견은 없습니다. 수술실 들어오시기 직전에 최종 판독이 정정되었네요. 방으로 돌아가시죠."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수술실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침대를 끌고 병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나는 황당함과 허탈함,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에 그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영화였다면 명장면이겠지만, 당사자인 나에게는 영혼이 반쯤 빠져나가는 블랙코미디였다.
범인은 이 안에 있었다: 쥐벼룩의 습격과 200만 원짜리 해피엔딩
그렇다면 대체 그 고열과 난리 법석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정밀 검사와 해프닝이 끝난 뒤, 의료진이 내민 최종 진단명은 모두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쥐벼룩에 물려서 발생한 전신 반응 및 열감입니다."
아니, 열흘간 금식을 하고, CT와 MRI를 찍고, 수술실 침대에 누워 온갖 고생을 하게 만든 주범이 고작 쥐벼룩 한 마리였다니!
처방은 너무나 소박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그에 맞는 항생제 일주일 치. 약값은 고작 2만 원 남짓이었다. 반면 지난 10여 일 동안 대학병원 응급실과 특수 검사들을 거치며 지불해야 했던 총 검사비는 2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통장에서 빠져나간 200만 원이라는 숫자를 보며 속이 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쥐벼룩이라는 사소한 생명체 하나가 내 통장과 체력, 그리고 정신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셈이니까. 황당함이 극에 달해 헛웃음만 나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 심각한 불치병도 아니었고, 큰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으며, 전체적으로 내 몸의 주요 장기들은 모두 '이상 무' 판정을 받았으니 말이다.
200만 원과 열흘치의 체중을 내주고 얻은 교훈은 명확했다. 비록 벼룩에게 털린 영혼과 통장이지만, 내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기분 좋은 결말이었다. 앞으로는 풀숲이나 모르는 길을 걸을 때 벼룩 조심부터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는 홀가분하게 병원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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